
루트임팩트 | 브로펌킨
누구나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브로펌킨 (루트임팩트)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씁니다. 잘 쓰지는 못 하지만 자주 씁니다.
글을 쓰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작가로 불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돌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 돌봄이 삶 깊숙이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5년 전부터 유기견을 입양해 돌보기 시작했고, 6년 전부터는 아픈 가족을 돌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던 나에게 돌봄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돌봄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선택을 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떤 존재를 돌보기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족이 병원에 가는 날이 잦아졌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병명이었다. 함께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조금씩 생겼다. 병원 스케줄에 맞춰 업무 일정을 조정하고, 갑작스러운 응급상황으로 약속을 취소하고 급하게 집으로 달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가족 간의 대화 내용도 달라졌다. 우리의 일상이 아픈 가족을 돌보고 병원에 가는 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서로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대화와 치료 계획에 대한 논의가 많아졌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서로 조용히 있는 날이 많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피로감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생겼다. 누군가 말했다. 어떤 사람의 자리가 비면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집안의 물건들, 쌓여 있는 걸 본 적이 없던 빨래통,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부분에 공백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돌봄은 예고 없이 내 삶에 찾아왔다.
돌봄의 주체에 메인과 서포터가 있다고 한다면 내 역할은 서포터 정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봄의 부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는 금전적인 지원으로 부채감을 덜어내려 했고, 가능하다면 시간을 내서 가족을 돌보려고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해야 할 만큼.
돌봄에 대한 필요와 인식이 생기면서 유기견들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SNS에서 유기견 입양 게시물이 유독 자주 눈에 띄었다. 돌봄이 필요하지만 돌봄이 부재한 존재들의 삶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들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유기견 한 마리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가 강아지에게 준 것보다 강아지가 내게 준 행복이 더 컸다는 것을.
갑자기 찾아온 돌봄의 의무는 내게 돌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돌봄을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그 시간 덕분에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돌보면서는 가족에 대한 마음과 소중함을 이전보다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많이 표현하게 된다. 감사함과 미안함, 애틋한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 모든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느낀다. 반려견을 돌보면서는 나만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생명체에 대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아무 조건 없이 반기는 꼬리 짓, 내가 슬플 때 조용히 다가와 기대는 따뜻함, 함께 산책하며 느끼는 소소한 일상의 기쁨들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돌봄에 대한 내 생각은 이제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 한다. 나도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질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때 나를 돌봐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돌봄의 의무가 개인에게만 지워진다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돌봄의 대상이 된 나는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한 신체적 도움뿐만 아니라 존중받고 싶을 것이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기로 한 선택이,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죄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의 희생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사회적 지원도, 인식 변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을 둘러싼 이런 고민들 속에서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다. 누구나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나도 돌봄의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돌봄에 대한 시각을 더 넓게, 깊게 열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더 나은 돌봄의 방식을,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들 거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2025년 헤이그라운드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멤버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커뮤니티 오피스입니다.
루트임팩트 | 브로펌킨
누구나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브로펌킨 (루트임팩트)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씁니다. 잘 쓰지는 못 하지만 자주 씁니다.
글을 쓰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작가로 불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돌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 돌봄이 삶 깊숙이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5년 전부터 유기견을 입양해 돌보기 시작했고, 6년 전부터는 아픈 가족을 돌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던 나에게 돌봄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돌봄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선택을 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떤 존재를 돌보기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족이 병원에 가는 날이 잦아졌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병명이었다. 함께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조금씩 생겼다. 병원 스케줄에 맞춰 업무 일정을 조정하고, 갑작스러운 응급상황으로 약속을 취소하고 급하게 집으로 달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가족 간의 대화 내용도 달라졌다. 우리의 일상이 아픈 가족을 돌보고 병원에 가는 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서로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대화와 치료 계획에 대한 논의가 많아졌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서로 조용히 있는 날이 많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피로감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생겼다. 누군가 말했다. 어떤 사람의 자리가 비면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집안의 물건들, 쌓여 있는 걸 본 적이 없던 빨래통,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부분에 공백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돌봄은 예고 없이 내 삶에 찾아왔다.
돌봄의 주체에 메인과 서포터가 있다고 한다면 내 역할은 서포터 정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봄의 부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는 금전적인 지원으로 부채감을 덜어내려 했고, 가능하다면 시간을 내서 가족을 돌보려고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해야 할 만큼.
돌봄에 대한 필요와 인식이 생기면서 유기견들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SNS에서 유기견 입양 게시물이 유독 자주 눈에 띄었다. 돌봄이 필요하지만 돌봄이 부재한 존재들의 삶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들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유기견 한 마리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가 강아지에게 준 것보다 강아지가 내게 준 행복이 더 컸다는 것을.
갑자기 찾아온 돌봄의 의무는 내게 돌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돌봄을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그 시간 덕분에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돌보면서는 가족에 대한 마음과 소중함을 이전보다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많이 표현하게 된다. 감사함과 미안함, 애틋한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 모든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느낀다. 반려견을 돌보면서는 나만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생명체에 대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아무 조건 없이 반기는 꼬리 짓, 내가 슬플 때 조용히 다가와 기대는 따뜻함, 함께 산책하며 느끼는 소소한 일상의 기쁨들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돌봄에 대한 내 생각은 이제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 한다. 나도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질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때 나를 돌봐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돌봄의 의무가 개인에게만 지워진다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돌봄의 대상이 된 나는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한 신체적 도움뿐만 아니라 존중받고 싶을 것이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기로 한 선택이,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죄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의 희생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사회적 지원도, 인식 변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을 둘러싼 이런 고민들 속에서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다. 누구나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나도 돌봄의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돌봄에 대한 시각을 더 넓게, 깊게 열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더 나은 돌봄의 방식을,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들 거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2025년 헤이그라운드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멤버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커뮤니티 오피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