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람 | 프립
가느다란 연결
강보람 (프립)
경험기획자
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빠른 직장인
장래 희망은 따뜻한 개인주의자
11월에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한 책은 <말이 칼이 될 때>였다. 혐오표현이 무엇인지, 왜 위험한지, 다른나라들은 어떤 규제를 하고 있는지 등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나는 주말마다 집에서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숏츠, 릴스 같은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인기 있는 시대에 혐오표현을 다루는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한다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 같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섯 자리 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되었다.
날씨도 좋은 어느 가을의 토요일 저녁, 나와 손님들은 거실 테이블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우리가 했던 또는 들었던 혐오표현은 무엇인지, 어떤 규제가 필요하다고 또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생각을 나누며 가느다랗게 연결되었다.
모임을 마치려는 순간 한 손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번 주 수요일에 저희 회사에서 하는 행사가 있는데 혹시 참여하실 분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태원 참사 생존자, 희생자들에 대한 책의 북토크예요.”
10.29 이태원 참사는 내가 관심을 갖지 못했던(않았던) 사건이었다. 참사 당일 인터넷에 떠돌던 무수한 현장 영상들 때문에 이미 고통스러웠고,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니 부단히도 잊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내가 귀 막고 눈 감은 사이에 1년이 지났고, 1주기에 맞춰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라는 생존자, 유가족의 인터뷰집이 나온 것이었다.
수요일에 계획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퇴근 후 을지로로 향했다. 높은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을 거슬러 건물 10층 교육장에 들어섰다. 독서모임에 오셨던 다른 손님도 이미 전자책으로 읽고는 참석해 계셨다. 그동안 이런저런 북토크에 많이 가보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장례식장에 가까웠다.
시작 시간이 되자 교육장 앞으로 사회자, 유가족 한 분과 작가님이 들어오셨다. 행사는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으로 시작했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님이 자신을 소개하셨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딸을 잃은 아빠”라는 자기소개에 이미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가 버렸다. 네 명의 아이 중 가장 애교 많고 살가웠던 둘째 딸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덤덤히 이어가시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주르륵 흐르는 콧물을 닦으며 책상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벚꽃이 피면 벚꽃을, 단풍이 물들면 단풍을 구경하는 1년 동안 사랑하는 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몇 차례나 사전 신고가 있었는데도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 채, 수없는 2차 가해를 견뎌야 했을 유가족들을 떠올렸다. 내가 애써 끊어냈던 이태원 참사와의 가느다란 끈을 찾아 연결하는 일이었다.
무척 슬픈 자리지만 이상하게도 그 곳에 나를 데려다놓은, 내가 꾹 눌러 감았던 눈과 귀를 열게 한 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중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그 무거운 자리에 모여앉은 20명 남짓한 사람들에게도 동료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 아버지에게 그랬듯 내 삶에 어떤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닥쳤을 때 내 곁에 서줄 것만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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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마음껏 타인과 연결되는 시간이 독서모임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되 서로 연대하는 시민사회를 꿈꾸며 3년째 계속해오고 있는데, 올해만 250여 명의 사람들과 퀴어, 동물권, 장애, 인권 등의 주제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느다란 실로 느슨하게 뜬 목도리 같은 이 연결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는 채 그저 한 땀 한 땀 뜨다 보니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도 연결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만들어나가다 보면 더 울창한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커다란 희망을 가져본다.
근사한 대화를 나누었던 손님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걸 보니 올해 성실히 살았나 보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 뜨개질을 계속해야겠다.
글을 읽고 들었던 생각, 작가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싶다면? 이 곳을 클릭해 의견을 남겨주세요.
이 글은 '2023년 헤이그라운드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멤버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커뮤니티 오피스입니다.
강보람 | 프립
가느다란 연결
강보람 (프립)
경험기획자
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빠른 직장인
장래 희망은 따뜻한 개인주의자
11월에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한 책은 <말이 칼이 될 때>였다. 혐오표현이 무엇인지, 왜 위험한지, 다른나라들은 어떤 규제를 하고 있는지 등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나는 주말마다 집에서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숏츠, 릴스 같은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인기 있는 시대에 혐오표현을 다루는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한다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 같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섯 자리 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되었다.
날씨도 좋은 어느 가을의 토요일 저녁, 나와 손님들은 거실 테이블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우리가 했던 또는 들었던 혐오표현은 무엇인지, 어떤 규제가 필요하다고 또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생각을 나누며 가느다랗게 연결되었다.
모임을 마치려는 순간 한 손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번 주 수요일에 저희 회사에서 하는 행사가 있는데 혹시 참여하실 분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태원 참사 생존자, 희생자들에 대한 책의 북토크예요.”
10.29 이태원 참사는 내가 관심을 갖지 못했던(않았던) 사건이었다. 참사 당일 인터넷에 떠돌던 무수한 현장 영상들 때문에 이미 고통스러웠고,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니 부단히도 잊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내가 귀 막고 눈 감은 사이에 1년이 지났고, 1주기에 맞춰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라는 생존자, 유가족의 인터뷰집이 나온 것이었다.
수요일에 계획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퇴근 후 을지로로 향했다. 높은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을 거슬러 건물 10층 교육장에 들어섰다. 독서모임에 오셨던 다른 손님도 이미 전자책으로 읽고는 참석해 계셨다. 그동안 이런저런 북토크에 많이 가보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장례식장에 가까웠다.
시작 시간이 되자 교육장 앞으로 사회자, 유가족 한 분과 작가님이 들어오셨다. 행사는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으로 시작했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님이 자신을 소개하셨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딸을 잃은 아빠”라는 자기소개에 이미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가 버렸다. 네 명의 아이 중 가장 애교 많고 살가웠던 둘째 딸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덤덤히 이어가시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주르륵 흐르는 콧물을 닦으며 책상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벚꽃이 피면 벚꽃을, 단풍이 물들면 단풍을 구경하는 1년 동안 사랑하는 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몇 차례나 사전 신고가 있었는데도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 채, 수없는 2차 가해를 견뎌야 했을 유가족들을 떠올렸다. 내가 애써 끊어냈던 이태원 참사와의 가느다란 끈을 찾아 연결하는 일이었다.
무척 슬픈 자리지만 이상하게도 그 곳에 나를 데려다놓은, 내가 꾹 눌러 감았던 눈과 귀를 열게 한 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중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그 무거운 자리에 모여앉은 20명 남짓한 사람들에게도 동료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 아버지에게 그랬듯 내 삶에 어떤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닥쳤을 때 내 곁에 서줄 것만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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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마음껏 타인과 연결되는 시간이 독서모임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되 서로 연대하는 시민사회를 꿈꾸며 3년째 계속해오고 있는데, 올해만 250여 명의 사람들과 퀴어, 동물권, 장애, 인권 등의 주제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느다란 실로 느슨하게 뜬 목도리 같은 이 연결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는 채 그저 한 땀 한 땀 뜨다 보니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도 연결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만들어나가다 보면 더 울창한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커다란 희망을 가져본다.
근사한 대화를 나누었던 손님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걸 보니 올해 성실히 살았나 보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 뜨개질을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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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3년 헤이그라운드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멤버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커뮤니티 오피스입니다.